주의)
오리지널 캐릭터가 많이 나옵니다.
약간의 불륜소재
5
“놀라신 모양인데 들어가서 차라도 하실래요? 밖에서 계속 얘기하는 건 좀 추워서.”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토마스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곧 남자는 닫힌 문을 열어 도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토마스는 그 뒤를 따랐다.
집은 몹시 따뜻했다. 라디에이터를 최대한으로 가동한 모양이었는지 공기가 건조했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남자는 신발을 벗고 맨발을 내딛었다.
“실내화가 하나밖에 없어서요. 그쪽이 쓰세요.”
사용감이 있는 남색 슬리퍼를 밀며 남자가 말했다. 토마스는 괜찮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남자가 이미 안 쪽으로 들어가 별 수 없이 슬리퍼에 발을 꿰어야 했다. 먼저 들어간 남자는 전기포트에 물을 채우고 콘센트를 연결했다. 그리고 찬장에서 인스턴트 커피와 크림을 꺼내 머그에 몇 스푼 옮겨 담았다. 토마스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거실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암체어에 앉았다.
의자 바로 옆에는 티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는 여러 책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아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기다란 병 몇 개가 테이블 기둥을 감싸듯 서있었고 그 옆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책탑이 높이 올려져 있었다. 테이블 바로 뒤에는 커다란 러그가 깔려 있었는데, 그 위에 낮은 베개 하나와 이불이 구겨진 채 놓여 있는 것을 보아 남자가 자주 잠을 청하는 곳인 거 같았다.
“드세요.”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불쑥 머그컵을 내밀며 말했다. 토마스는 가볍게 인사하며 머그를 받아 들었다.
“그쪽은 안 드세요?”
“잠이 잘 안 와서요.”
맞은 편 벽에 기대선 남자는 제 두 눈을 비볐다. 여전히 부은 듯한 눈이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결코 조급하지 않았지만 재촉하는 것 같단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편히 앉지 않는 모습이나, 눈을 마주하지 않는 시선 같은 것들이 그가 빨리 이 상황이 마무리되길 바란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토마스는 잠시 머그잔 안을 바라보며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애인이 떠난 것도 기가 막힐 텐데, 그 사고가 다른 사람과 밀월여행을 가다 일어난 것이니. 슬퍼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보름간 오롯이 안고가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이렇게 불쑥 찾아 온 점이요. 칼렌베르거 씨에 대해 알아보려고 온 게 맞지만, 두 분이 그런 관계인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비슷한 처지인데 본의 아니게 폐 끼쳐서 미안하다, 뭐 이런 말씀이신가 보네요.”
토마스는 결코 남자와 자신이 비슷한 입장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이야기를 꺼내봤자 쓸데없는 소리에 불과할 게 분명하단 이유에서였다. 그럴 바엔 그가 오해를 하게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한 사람 더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알렉스가 죽은 지 벌써 보름이나 지났고, 그쪽 부인에 대해선 그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그쪽은 이제 안 것 같으니 배려를 해줘도 내가 해줄 때죠.”
“케이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까?”
“그냥 어렴풋이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이름인지는 사고 후에야 알았고, 막연히 알렉스에게 어떤 사람이 있는 것만 알았어요. 그리고 그 상대가 결혼한 사람이란 것 정도까지만.”
남자는 눈을 두 어 번 깜박이다 말을 이었다.
“오래 안 건 아니에요. 두 달 정도 되었나. 어떻게 해야 좋을 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아무 소용없게 됐네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입을 다물었고 토마스는 그 침묵에 동조했다. 건조한 공기 사이로 라디에이터 소리가 부유했다.
6
그 날, 오랜 침묵 끝에 토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물어 봐요, 라고 남자가 말했지만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고 실례가 많았단 인사와 함께 집을 나섰다. 차에 다다랐을 때에서야 그에게 이름이라도 물었어야 했단 생각이 들었지만 돌아가진 않았다. 대신 의뢰했던 보고서를 한 번 더 읽었다. 세대주, 민호 박. 이 이국적인 이름을 아마 앞으로 다시 마주할 일은 없을 테지만 토마스는 몇 번이나 속으로 읊으며 남자의 이름을 기억했다.
토마스는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병원에 나갔다. 그의 팀메이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왜 여기 있느냐 물었지만 토마스는 케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할아버지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례적인 배려를 해줬는데 왜 받질 않느냔 인자한 물음에 토마스는 일을 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고 둘러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을 하는 동안엔 케이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마음은 편했다. 그러나 의구심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케이트는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걸까.
집안이 집안이니만큼 결혼 전 케이트와 계약서를 작성했다. 으레 그렇듯이 내용의 대부분은 ‘만약’의 경우가 벌어졌을 때 재산분할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토마스는 그보다 상위의 문서 하나를 더 작성하였다. 기나긴 이야기가 적힌 계약서와 달리, 그 문서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전부였다.
토마스 에디슨은 케이트 바덴이 이혼을 원할 시 사유와 관계없이 항상 동의하며, 이 때 혼전계약서의 재산분할 항목은 모두 무효로 한다.
케이트에게 그 문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다 내가 딴 남자랑 눈 맞아서 네 재산 홀라당 가지고 나르면 어쩌게? 토마스는 진지하게 답했다. 그래도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그냥 나한테 말해줘.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한참 토마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는 두 눈 위에 손가락을 얹고 힘을 실어 눌렀다. 며칠 간 몰아 일을 했더니 피로감이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웬만해선 레지던트 선에서 받을 ER콜까지 직통으로 받고 있었다. 식습관이 불규칙해진 것은 당연하거니와 수면시간도 부족했다. 하루에 쪽잠 잔 것을 모두 합쳐도 네 시간 남짓 될까. 주말에는 쥐 죽은 듯이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토마스는 눈썹 뼈 위를 꾹꾹 누르며 들어오라 말했다. 고개를 길게 내밀며 레지던트 3년차 프레이가 들어왔다.
“ER이야?”
눈을 길게 깜박이며 토마스가 말했다.
“네, ER인데… 그냥 쉬시는 게 나을 거 같네요.”
“아냐, 다 쉬었어.”
“별로 그래 보이지 않는데 그대로 일어나셔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건 어떠세요?”
주근깨가 자잘하게 박힌 프레이의 콧잔등 위로 옅은 주름이 졌다.
“다 쉬었대도.”
토마스가 자리에 일어나며 반박하자 프레이는 조금 더 인상을 썼다.
“의국 사람들이 선생님 두고 무슨 말 하는지 아세요? 저렇게 따라 죽으려는 거 아니냐고 해요.”
프레이의 목소리는 조금도 격하지 않았으나 담긴 내용은 거침없었다. 토마스가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가운을 둘러 입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조금도 꺾지 않는 고집에 프레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나로 묶은 그녀의 붉은 긴 머리가 흔들렸다. 토마스는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프레이가 따랐다.
“다들 날 너무 로맨티스트로 알고 있네.”
“아니에요? 상류층 남자가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 했는데. 이거 로맨스 영화에 많이 나오는 거잖아요. 좀 구식이지만.”
그녀의 말에는 조금도 틀린 구석이 없었지만 정작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모순됨에 토마스는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실소이기도 했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지.” 토마스가 중얼댔다.
“그래서 이번 환자는 뭐가 문제야?”
엘리베이터에 타며 토마스는 물었다. 금세 문이 닫히고 위에 붙은 표시등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추락에 의한 골절이요. 사태가 심각한 건 아니고 쇄골이 부러져서요. 동맥손상 확인하려고 ct실 보냈어요.”
“어쩌다 추락했대?”
“계단에서 굴렀다니 발을 삐끗한 거겠죠. 술 냄새도 좀 나고.”
“술 냄새?”
토마스가 재차 물으니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술로 샤워라도 했는지 냄새만으로도 취할 기세였어요.”
“급성 알코올 중독 확인 안 해봐도 돼?”
종종 노숙자들이 그런 식으로 들어와 난리가 나곤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정형외과에서 받았다가 쇼크로 급하게 내과가 달라붙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큰 탈 없이 무사히 넘어가지만, 긴급수술 진행 중에는 큰 일로 번질 수도 있었다. 프레이는 어깨를 으쓱이곤 답했다.
“바이탈 사인에 큰 이상은 없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과 콜 해서 확인할까요?”
고개를 젓는 걸로 토마스가 답을 대신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덜커덩 대며 문이 열리자마자 두 사람은 빠르게 걸어 이동했다. ER 입구에서부터는 프레이가 조금 더 앞서 걸었다. 그녀는 방금 전 확인했던 베드로 토마스를 이끌었다.
프레이가 멈춘 곳에서 토마스 역시 멈춰 섰다. 단번에 토마스의 시야에 환자의 몸과 얼굴이 잡혔다. 토마스가 환자를 확인하고 멈칫하길 잠시, 프레이의 말대로 환자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났다. 그는 지난주에 들렀던 작은 아파트를 떠올렸다. 테이블 기둥을 감싸고 있던 기다란 술병들. 급성 알코올 중독 보다는 만성 중독을 염려해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