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캐릭터가 많이 나옵니다.
7
민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엄연히 골절된 부위가 있는 걸 두고 ‘나쁘지 않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리 이치에 맞는 것 같진 않으나, 경험적으로 판단할 때 경상에 가까웠다. 동맥 손상 없이 오른쪽 쇄골 골절과 가벼운 발목 염좌. 분쇄 골절이 아니기에 수술이 시급하진 않아서 붕대로 고정만 시킨 채 그대로 입원 시키는 것으로 했다. 지시를 내린 뒤, 토마스는 프레이에게 환자가 깨어나면 바로 자신에게 연락을 넣으라고 일러두고 다른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프레이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또 보게 되네요.”
토마스의 말에 민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 상태가 이래서 악수는 못 하겠네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감염 때문에 악수 안 하는 게 권장사항이라서.”
토마스는 들고 온 태블릿에 엑스레이 사진을 띄우고 그것을 민호가 잘 볼 수 있게 그의 무릎 위에 올렸다.
“프레이 선생한테 얼추 들으셨겠지만 쇄골이 부러져서 수술이 필요합니다.”
“네, 그렇게 말하더군요.”
“두 동강난 뼈가 제대로 붙게 여기에 핀을 연결할 거예요. 그리고 뼈가 다 붙고 나서 다시 수술로 제거하고요. 보통 뼈 붙는데 4주 정도 걸리고, 완전한 회복까진 이후 3개월 내지 4개월 정도 걸립니다.”
그는 화면 위를 정확하게 짚으며 설명했다. 민호의 시선이 토마스의 손끝을 따르다 이어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민호가 물었다.
“그럼 최대 4개월간 병원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요. 핀 제거 이후에는 외래로 다니셔도 되니까 짧으면 4주 반, 길면 7주 정도면 됩니다.”
민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젓고 토마스와 눈을 마주하며 다른 것을 물었다.
“수술은 언제 합니까?”
“이제 정해야죠. 가장 빠른 스케쥴은 내일 저녁입니다.”
“그럼 그 시간으로 해주세요. 더 미룰 게 뭐가 있겠어요.”
동의의 의미로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호의 무릎 위에 올려둔 기기를 회수했다.
“수술에 대해선 프레이 선생이 더 자세히 알려드릴 겁니다. 이후에 동의서 작성해주시면 되고요. 그 전에 보호자분과 연락 해놓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보호자분도 서명하셔야 하니까.”
“보호자 없으면 안 됩니까?”
“아뇨, 추가로 서류 하나만 더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민호의 반응을 보아, 보호자가 없는 듯 했다. 혹은 보호자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거나. 무엇이든 확실한 것은 그가 현재 혼자이고, 혼자이길 바란단 것이었다. 토마스는 다시 지난주의 일을 떠올렸다. 조용한 집안과 빈 술병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높이 쌓인 책더미. 그때는 갑작스러운 사실이 당황스러워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으나, 지금 와보니 명백한 우울 증세였다. 아마도 그의 애인이 죽은 이후로 그는 줄곧 그랬을 것이다. 그 말인 즉, 3주 넘게 술독에 빠져 지냈단 소리다. 알코올 의존 초기 단계에 이미 진입했을 지도 모른단 판단이 섰다. 토마스는 제 손에 들린 태블릿의 등판을 의미 없이 두드렸다.
“뭐 더 얘기할 게 있습니까?”
민호가 물었다. 토마스는 고개를 젓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쉬세요. 그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성큼성큼 발을 내딛어 곧장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레지던트 몇 명과 의국 간호사가 여느 때처럼 각자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토마스에게 가볍게 인사하곤 저들의 자리 일부를 내주었다. 익숙하게 토마스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에 집중한 채 자판을 두드렸다. 새로운 오더가 그의 이름하에 내려졌다.
8
병원 내 패권싸움은 명분보다 얼마나 수익을 내느냐는, 실리에 달려있다. 자잘한 시술로 버는 돈 보다 커다란 수술로 벌어들이는 돈이 더 큰 것이야 당연하고, 때문에 병원 내부의 권력은 외과 계열 중심으로 배분되었다. 그리고 토마스는 그 권력의 중심에 서야 했다. 80살 먹은 노인이 다 되었음에도 여전히 정정하고 능구렁이 같은 그의 할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지분을 바로 아랫대에 상속하지는 않을 것이라 밝혔었다. 그 말은 곧 토마스가 그의 아버지와 상속권 다툼을 해도 된다는 뜻이었고, 토마스는 기꺼이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참전하였다. 그러니 메디컬 스쿨에 진학할 때부터 토마스의 전공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반골 기질이 있었다.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만 해도 제 부모의 말에 껌벅 죽었으니. 아마도 그 때, 그런 식으로 속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착실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전공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몸을 담았던, 혹은 몸을 담고 있는 흉부외과였을 것이고, 아버지를 상대로 권력 다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일에 대한 가정은 기껏해야 혀끝을 씁쓰름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현실의 토마스는 아버지의 밑이 싫어 정형외과에 지원하였고 기어코 스탭 자리까지 차지하여 명실상부한 후계자 후보로 자리 잡았다. 앞으로 잘만 하면 최소한 할아버지의 지분 중 3분의 1은 차지할 수 있으리라 자부할 정도였다.
돌아가는 상황은 이렇지만 사실 토마스는 할아버지의 지분 따위에 큰 욕심 없었다. 제게 돌아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오히려 지분에 더 눈독을 들이는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한때 미세스 에디슨으로 불리었던 여자. 두 번의 이혼으로 본래의 성씨를 되찾은 그녀는 에디슨 가의 유산을 탐낼 만큼 궁하지 않았다. 애초에 토마스가 가진 신탁의 절반은 그의 외가에서, 즉 그의 외조부모로 부터 온 것이었다. 하나 뿐인 손주에 대한 사랑이 몹시 지극하셔서 그에게 물려준 유산이 답지 않게 많긴 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그 이외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으니 여생 동안 펑펑 쓰고 살아도 토마스에게 물려줄 몫이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에디슨 가의 유산에 촉각을 기울이는 것은 일종의 복수였다. 사랑 없는 결혼이란 것을 알고 하였고, 그 파탄에 스스로도 일조한 바가 있음에도 그녀는 첫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간절히 토마스가 정통한 상속자가 되길 기도하는 것이다. 딱히 자신의 아들을 사랑해서, 아들이 더 잘 되길 바라서는 아니었다.
토마스 입장에선 아버지나 어머니나 어느 한 쪽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엄밀히는 어느 쪽도 토마스에게 제 아군이 되어 달라 요청할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어머니의 종용에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결국 그 태도에 있었다. 뻔뻔하게 구는 사람과 덜 뻔뻔하게 구는 사람. 어느 쪽도 완전히 끊어낼 수 없는 이상, 후자의 편을 드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역시 불쑥 불쑥 찾아와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고 가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토마스는 책상 위에 널린 사진들을 대충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담았다. 케이트가 죽은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새로운 며느리를 물색하고 있었다. 5년 전, 아버지가 결혼을 하라 명령을 내렸을 때만 해도 길길이 날 뛴 분이었단 걸 생각하면 세월이란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아무 생각 없으세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 네가. 그 어르신 꿈이 죽기 전에 증손주 보는 거란 거 몰라?
-그럼 더 생각 없으시겠네요. 당신이 100세까지 사실 거라 호언장담하시거든요.
-노친네 늙더니 사리 분간을 못 하네.
비비꼬인 목소리에 증오가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토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당장 필요한 일 아니에요. 아마 몇 년은 그걸로 신경 쓰시지 않을 거니까 벌써부터 이러지 마세요.
-주변 시선 때문에 그러는 거니?
-사람 된 도리요.
-그럼 그 애랑 애초에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니니? 아니면 살다보니 그 애가 좋아지기라도 한 거니?
토마스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토마스를 빤히 응시했다. 곱게 발린 입술이 미세하게 비틀렸다.
-당장 하란 말은 아니야. 하지만 봐두긴 해. 네 아버지가 붙여주는 거 보단 내가 낫잖아?
어머니는 쏘아붙이듯 말하곤 자리를 떠났다. 여린 힘줄이 솟을 만큼 핸드백을 꽉 쥐었으면서도 걸음걸이는 품위 있었다.
사진을 정리한 뒤 토마스는 그녀에게 내주었던 커피를 치웠다. 몇 모금 마시지 않아 거의 새거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개수대에 버리고 차가운 물을 틀어 대강 컵을 씻었다. 물기가 빠지도록 엎어 놓은 머그컵에 빛이 반사되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사람 된 도리를 신경 썼다면 애초에 하지 않았어야 할 결혼이었다. 토마스는 케이트에게 청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펍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점심에 나온 구내식당 메뉴를 얘기하듯 물었다. 나랑 결혼할래? 케이트의 첫 반응은 웃음이었다. 정말로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을 때 지을 법한 웃음. 토마스의 표정을 읽는데 능숙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농담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따라온 두 번째 반응은 당혹이었다. 살짝 오른 취기에 발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었는데, 언제 그랬냔 듯이 창백하게 변했었다. 케이트가 진담을 한 것이냐 물었다. 토마스는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뒤에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펍을 빠져나갔다. 그때 그녀도 한 손에 핸드백을 꼭 쥔 채였다. 제 어머니와 다른 점이라면, 낮은 굽의 구두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쿵쿵 대며 땅에 분노를 새겼단 것이다.
케이트는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다시금 떠오르는 의문에 토마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까만 시야가 우주처럼 펼쳐졌다. 그러다 한 가운데에 인영이 나타났다. 지난밤에 그가 수술했던 환자였다. 오전 중에 입원실로 옮겼으니, 오후 회진 때 병동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당장 지금이라도 몇 층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토마스는 물에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의자에 걸어놓은 가운을 거두어 팔에 꿰었다. 완벽히 복장을 갖춘 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들어온 연락이 한 통도 없었다. 봐야하는 환자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도 그에게 콜을 넣지 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ER로 향하기로 마음을 먹고 연구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