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타입을 주로 이용하고 있으나 불현듯 생각이 나 티스토리에 업데이트를 해봅니다.
9
무통주사 주입 주기가 시간 단위로 늘어난 뒤 민호는 보험사에 전화했다. 수술을 받기 전에 한 번 통화를 해놓긴 했지만 상담원이 영 시원치 않았던 느낌이라 재차 확인이 필요했다. 다행히 이번에 연결된 상담원은 사려 깊었다. 실제 성격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민호를 대하는 태도는 믿음직했다. 상담원은 한 번 더 계약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상해에 따른 수술비는 10만불까지 보장이 되며, 입원비는 수술 전후 포함 4주간 보장, 이후 재활치료비는 기간에 관계없이 전액이 지원된다. 학교에서 퇴직 당하면서 급한 대로 찾아 들은 것이었는데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다. 입원 기간 보장이 짧단 것이 좀 흠이지만, 저렴한 것으로 골라 들은 제 탓이니 별 수 없었다.
조금 이르게 오후 회진을 돈 의사는 민호의 상태를 확인하고, 제 수하의 의사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더 볼 일 없단 듯이 돌아갔다. 일주일 하고 며칠 새 수척해진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 피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죽은 부인의 외도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니 그렇게 무리하는 게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본의 아니게 다쳐서 병원신세를 지게 된 점은 유쾌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이점은 있었다. 약 기운에 잠을 잘 수 있단 것이다. 민호는 알렉스가 죽은 뒤로 한시도 제대로 잠들 수가 없었다. 한참을 침대 위에 누워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다 술을 한 가득 목구멍으로 들이 부은 뒤에야 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 잠에 든단 것보단 정신을 잃는단 것에 가까웠지만 한숨도 자지 못 하는 것보단 나았다.
의사는, 그러니까 알렉스와 같이 죽은 그 여자의 남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들의 초기 단계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수학 선생이었던 민호에게 의학적 지식은 거의 전무했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런 결론이 섰다. 백수인 자신과는 달리 그는 일거리가 많아 몸을 최대한 많이 사용하여 억지로 잠에 든단 것 정도가 차이일 것이다.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의 추론이 맞느냐, 틀리냐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런 걸로 신경을 써줄 만큼 민호의 상태는 여유롭지도 않았거니와, 둘의 사이가 마땅치도 않았다.
“저 왔습니다.”
민호를 담당하는 간병인이 맑게 말했다. 그의 앞에는 휠체어가 놓여 있었고, 그 휠체어에 연결된 봉으로 그는 빠르게 민호의 정맥주사와 무통주사를 옮겼다.
“뭐 검사 있어요?”
회진 때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 했기에 민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조무사는 수술한 부위를 조심해 그를 일으키곤 대답했다.
“아뇨, 검사는 없으시고 진찰 예약된 게 있어서요.”
“진찰요? 회진 아까 돌았는데.”
“그건 정형외과고요. 선생님이 다른 과 진찰 오더 내리셨거든요. 아마 퇴원 이후에도 외래로 다니셔야 할 거예요.”
당최 어느 과를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민호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렇다고 저를 옮기는 손을 밀어내진 않았다. 민호가 휠체어에 앉자, 조무사는 병실 문을 열고 휠체어를 힘주어 밀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층에 있어서 빠르게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조무사가 누른 버튼이 붉게 빛났다.
“3층엔 뭐가 있습니까?”
“내과계통이랑 정신과, 신경과 진료실하고 물리치료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방사선과도 있고요.”
엑스레이와 ct촬영은 이미 수차례 하였으니 방사선과는 아닐 터였다. 그럼 물리치료실일까. 철심을 박은 지 이제 겨우 이틀이 되었는데 벌써부터 받아야 하나 싶어 민호의 고개가 저절로 갸우뚱해졌다. 다만 그런 의아함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어련히 알아서 내린 치료일 텐데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때마침 알싸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민호는 묵묵히 무통주사 버튼을 누를 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달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간병인은 힘을 줘 휠체어를 밀었다. 그는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 않게 이동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를 지나고 코너를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표지판에는 양쪽에 무엇이 있는지 적혀있었다. 왼쪽은 소화기내과와 순환기내과, 그리고 정신과 진료실이고, 그 반대는 신경과와 물리치료실, 방사선과였다. 민호는 오른쪽이겠거니 하고 휠체어가 방향을 틀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정작 휠체어는 왼쪽으로 돌았다.
“물리치료실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뇨? 민호 씨는 아직 물리치료 받을 단계가 아니에요.”
간병인은 대답하면서도 휠체어를 안정적으로 밀고나갔다. 그와 달리 민호는 고정된 어깨로 인해 몸이 잘 돌아가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간병인을 쳐다보았다.
“그럼 어디로 가는 겁니까?”
“마침 다 왔네요.”
간병인이 휠체어를 밀던 것을 멈췄다. 그리곤 오른쪽 방향으로 꺾어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쭉쭉 뻗은 복도만이 들어차던 민호의 시야에 대기실과 데스크가 보였다. 그리고 데스크 위쪽으로 여느 과와 마찬가지로 과명이 새겨진 팻말이 달려 있었다. 정신과. 민호가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데스크를 보던 간호사가 간병인을 맞았다.
“박민호 씨인가요?”
“예, 지금 예약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요.”
간호사가 진찰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하는 울림 끝에 금세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간호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문을 열었고, 간병인이 곧장 열린 문틈 사이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10
토마스는 ER을 나서기 무섭게 제 앞을 가로막는 것에 발을 멈췄다.
“뭡니까, 대체?”
민호의 목소리에는 거친 숨이 섞여있었다. 흡사 금방이라도 제 멱살을 잡을 것 같이 들이밀어진 고개에선 약간의 열기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회진에서 얌전히 누워 있던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중간에 벌어졌을 일이 궁금했겠지만, 토마스의 생각은 그런 쪽으로 흐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되는데요. 여기 휠체어 좀 주시겠어요?”
토마스가 근처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단 듯이 냉큼 휠체어를 끌어다 놓았다. 문제는 민호였다. 잔뜩 상기된 얼굴과 몸이 온통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토마스가 민호의 어깨를 감싼 채 말했다.
“이러고 계시면 수술한 부위 터져요. 간병인은 어떻게 하고 혼자 온 거예요?”
“당신 뭐냐니까.”
마치 제 물음이 먼저라는 듯이 민호는 대답 대신 자신의 말을 반복했다. 와중에도 토마스는 그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는데 팔에 달려 있어야 할 라인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토마스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곤 항복했단 것처럼 민호를 붙잡은 두 손을 떼었다.
“그 뭐가 뭔지 알려주시겠어요? 그리고 휠체어에 좀 앉으세요. 링거는 다 어디에 두고 온 거예요?”
하지만 정작 민호는 그 말에 정반대로 행동했다. 다치지 않은 쪽의 팔로 기어코 토마스의 옷깃을 잡아챈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토마스를 제 고개 쪽으로 잡아끌기까지 했다. 토마스는 조금 더 깊게 인상을 썼다.
“당신 본인이 잠 하나 제대로 못 잔다고 나도 똑같아 보여? 누구 멋대로 사람을 정신과에 집어넣고 있는 거야. 뭐? 알코올 의존증? 댁이나 일에 매달리지 말고 약 좀 받지 그래.”
“전 잠을 못 자는 게 아니라 안 자는 겁니다.”
“퍽이나.”
“믿지 못하셔도 그게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일단 자리에 좀 앉으시죠. 링거도 다시 꽂으시고요.”
간곡한 말이 꼭 애원하는 듯 했지만 토마스의 목소리는 큰 어조 변화 없이 단호했다. 사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민호가 자신의 말을 따라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가끔씩 달려드는 환자들의 태도가 늘 그런 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호의 현재 태도가 충분히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토마스의 예상대로 민호는 단박에 거절했다.
“싫어.”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뭐가 어쩔 수 없냐고 민호가 묻기도 전에 토마스가 몸을 움직였다. 수술한 어깨 쪽을 힘을 실어 누른 것이다. 대번에 민호가 비명을 질렀고 꼿꼿했던 그의 무릎이 무너졌다. 그 틈을 타 휠체어를 잡고 있던 스태프가 그를 받쳐 자리에 앉도록 했다. 미리 진통제를 꺼내둔 스태프는 토마스에게 약을 건넸고, 토마스는 여전히 끙끙대는 민호의 팔에 재빨리 실린더를 꽂았다. 여러 행동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렸다. 토마스의 눈짓에 휠체어가 민호의 병실 쪽으로 움직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효가 바로 도는 것은 아니어서 민호가 겨우 한숨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병실 침대 위였다. 담당 간호사가 민호의 라인을 다시 잡는 동안 토마스와 함께 따라온 스태프들은 침대를 에워쌌다. 혹시라도 그가 아까처럼 다시 난동을 피울 염려 때문이었다. 그것이 민호의 눈에도 뻔히 보여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아예 묶어두지 그래?”
“고소 당할까봐 무서워서요.”
토마스의 대답에 민호는 기가 찬 듯 웃었다.
“당신이 날 정신과에 집어넣은 걸로는 고소해도 그딴 걸로는 안 해.”
“밖에서들 좀 대기할까.”
토마스가 스탭들을 두고 말했다. 그들은 즉시 자리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병실에는 민호와 토마스만이 남았다. 차가운 침묵이 방안에 가득했다. 토마스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왜 정신과 진료를 요청했는지부터 설명 드릴게요.”
“필요 없어. 철회나 해.”
단박에 민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토마스는 충분히 예상한 일이기에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박민호 씨 처음 봤던 날에도 술에 취해 계셨고, 집 바닥이 온통 술병이었죠. 그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했고. 지금이야 약 효과 때문에 계속 잠을 주무셨지만 퇴원하고 나시면 다시 또 잠이 안 올 겁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술을 찾을 거고 계속 반복 되겠죠. 이건 전형적인 의존증 초기 증상이에요. 이게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면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거고요. 그러니까 초기인 지금 치료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오더넣은 거예요. 다친 곳 낫는 데에도 그게 필요하고요. 이쯤이면 충분히 납득이 되나요?”
토마스는 진심으로 그가 이해하길 바라며 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을 보아 그가 소원하는 바는 이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혀. 전혀 안 되고 앞으로 안 될 거니까 철회나 해.”
민호의 목소리에선 이제 어떤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히 차단되는 벽이 제 앞에 놓여진 것만 같아 토마스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설득의 말을 건넸다.
“그냥 상황에 대해 이야기 몇 마디만 하고 약만 꾸준히 드시면 되는 일입니다. 그게 어렵나요?”
정형외과에 찾아온 환자에게 정신과 치료를 권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나 경험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치료에 거부감을 보이는 케이스들은 대체로 정신과에 대한 과한 두려움 때문에 겁을 먹는 경우였다. 눈앞의 남자는 딱히 그런 양상일 것 같지는 않으나, 적어도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은 극명해 보였기에 으레 그랬듯이 별 것이 아니다 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민호는 대답없이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참 끝에 물었다.
“그때 우리집에 찾아왔을 때. 그냥 온 거 아니었지?”
토마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스 뒷조사 하고 온 거잖아.”
민호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조소가 엿보였다.
“그게 티가 났나요?”
“당신 같은 부류들 특성을 모를 수가 없어서. 성 보고 혹시나 했는데 이 병원 후계자라면서. 구글이 친절하게 알려주던데.”
“그게 지금 상황과 연관이 있나요?”
“그 뒷조사에 나에 대한 정보는 없었나봐?”
“간단한 거밖에 없었어요. 애초에 칼렌베르거 씨에 대해 조사한 거라서 당신은 그냥 동거인이자 집 주인으로만 나왔어요.”
제 말을 믿으실진 모르겠지만. 토마스가 덧붙이는 말에 민호는 조소마저 지운 채 차가운 낯으로 토마스를 응대했다.
“나 사립학교에서 일했습니다. 선생으로. 대학 졸업하고 계속. 그런데 알코올 의존증 기록이 있으면 학교 입장에선 어떨 거 같아요? 하물며 교칙 위반으로 잘린 마당에?”
내내 존칭을 쓰지 않던 것은 없었던 일인 것마냥 민호는 격의 있는 단어를 사용하며 말했다. 그것은 몹시 딱딱하기 짝이 없었는데, 민호의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토마스는 그의 온몸에 얼음으로 된 날카로운 바늘이 둘러 싸 그를 지키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의료기록을 그렇게 쉽게 떼어서 볼 순 없어요.”
“당신 같은 부류들은 할 수 있잖습니까? 그간 얼마든지 해왔고.”
원론적인 말에 현실적인 의문이 정곡을 찔렀다. 토마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마른침을 삼키는 것만이 토마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또한 더욱 날카로워진 민호의 가시바늘이 그를 찌르기 직전까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묵시하는 것 뿐.
“그거 말고도 내가 든 보험에서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실직해서 수입도 없는 마당에 5분씩 상담료 책정하는 걸 내가 어떻게 감당해?”
자조가 섞인 말에는 비참함 보다는 토마스를 향한 힐난이 담겨 있었다.
“신경 써준 건 참 고마운데, 당신 신경은 별로 받고 싶지 않네요. 괜한 호의 베풀겠다고 멋대로 굴지 말고 본인이나 신경 쓰시죠.”
민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 비틀어 문쪽을 가리켰다. 그 제스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에 토마스는 쓰게 웃음 짓고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